| 이달의 영화&글

단순한 해설을 넘어, 영화와 세상이 만나는 접점을 탐구하는 ‘다달’만의 특별한 기록입니다.

[다달] 독립영화 큐레이션 구독 서비스, 다달 5호 (2026.07.01.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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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김태일│2000│다큐멘터리│125분

<기이한 춤; 기무>

박동현 | 2010 | 다큐멘터리 | 6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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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용환


4월 9일


누구나의 인생에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부끄럽다면 더욱. 대학을 입학한 지 얼마 안 되던 어느 날. 이미 때는 90년대 중반을 넘었고 민주화 투사가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운동권과 재야. 뭐 이런 단어들이 점점 대학과 어울리지 않았던 그때. 박종철의 아버지가 학생회의 초청으로 학교에 왔다. 아무도 이 행사에 관심이 없었고 나 또한 그 노인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광장을 지나쳐 도서관을 향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역사학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박종철 기념관 특강에 나서게 되었다. 박종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보도를 통해 알고 있었고 오늘 행사는 그냥 시민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겠지 하는 믿음. 그렇지 않았다. 당일 박종철의 형님이 강연장을 찾았고 강연 내내 나는 부끄러움에 몸을 떨었다.

 “죄송합니다.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고 평생 마음에 죄스러움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공부를 하고 역사를 알게 되면서 나는 그날 얼마나 중요한 만남을 소홀히 하며 내 갈 길을 갔는지, 또한 그 초라했던 금잔디 광장의 서글픈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등에 짊어지고 연단에 나섰던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책무가 세월이 갈수록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4월 9일>. 이 작품은 유가족들의 항의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박종철의 아버지, 전태일의 어머니, 이한열의 어머니. 그밖에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하지만 자식의 용기로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부모들의 소리 지름이 영화의 시작을 이뤄내고 있다. 이들은 국회의사당 앞에 비닐 천막을 치고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화 운동, 민중항쟁 같은 그럴듯한 가치로 포장되어 있지 않은 날 것의 현실. 이들은 좋은 옷을 입지 못했고, 자신의 삶이 아닌 무엇인가를 위해 따지고 싸우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들을 막아선 공무원들은 짐짓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지만 천막을 철거하려는 목표에만 집중하고 있다. 일종의 역할극인가? 뒤늦게 등장한 가죽 재킷의 경찰 서장. 얼굴에 난 커다란 사마귀와 벗겨진 머리의 나이 지긋한 그는 눈을 부라리며 아버지와 어머니와 말싸움을 시작한다. 아직도 유신 시절이라 믿는 것인가. 여전히 세상은 같은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믿음 때문인가. 세상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던 것인가.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영화는 역동적이다. 많은 사람들의 증언이 그러한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를 통해 영화는 1970년대 유신 시절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찬란했던 산업화의 시대.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하고 헌신적인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잘 먹고 잘살 수 있었을까? 그렇게 믿어지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재에 대해 스크린에 등장한 사회학자 김동춘은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역사는 다면적이며 다층적이다. 5·16군사쿠데타의 명분은 놀랍게도 4·19의거의 완성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과 민주당을 동급으로 취급했고, 국민이 혁명을 통해 이승만을 몰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승만과 같은 시대가 도래했음을 개탄했다. 이제 군인들이 나서서 혁명적 요구를 실천해야 할 때이다. 경제개발, 새마을운동 그 정열적인 집요함의 배경에는 취약한 명분에 대한 끝없는 합리화 과정이 내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본질은 선거를 통한 자유로운 권력 이동 아닌가. 더구나 이미 혁명을 이룬 나라의 국민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명분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지속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지지해야만 하는 이유 말이다. 할 일은 명확하다. 분단 체제와 반공의 시대. 자유 대한을 위협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빨갱이가 우리 곁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사람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정권을 지지할 것이다. 20년 통치 기간 동안 그토록 반복되던 용공 조작의 본질은 혁명을 성공한 나라의 국민과 그것을 명분으로 집권했던 대통령의 독재를 향한 검은 야욕이 빚어냈던 가장 고통스러웠던 1970년대의 민낯이다. 그리고 그토록 추악했던 그 시절에 일어났던 인혁당 사건. 작품은 인혁당 사건을 통해 부끄럽고 가슴 아팠던 시대의 맨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작품은 시대에 맞섰던 무수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비극과 비극에 대한 저항과 비극을 극복해 나갔던 이야기를 동시에 나누고 있다. 작품을 보고 역사를 알자. 또한 역사를 알아 작품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보자. 나에게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었다면 당신에게는 무엇이 이토록 억울했던 이야기를 직면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까?



기무


“형님, 한옥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음… 내 경우에는 말이야. 한옥에서 중요한 것은 마당이라고 생각해. 잘 봐. 전통 가옥의 경우 기와집이건 초가집이건 마당이 있어. 앞에는 자연이 있고, 담과 대문이라는 기준을 통해 마당이라는 자연과 인간의 중간 지대가 있지. 그리고 다시 대청마루를 거친 후에 방에 도달하게 돼. 내가 보기에 한옥은 자연에서 인간으로, 마당을 거쳐 방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자연과의 어울림이 보존된 공간 같아.”

건축가 조정구 선생의 대답이었다. 정구 형님은 국내에서 최초로 한옥 호텔을 지으며 소위 한옥의 명인으로 인정받는 인물이고 또한 한옥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전국에 유명한 건물을 많이 지은 인물이지만 자신을 한옥의 틀에 가두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뭐, 당연하지 않겠는가. 실존주의자 사르트르, 구조주의자 레비스트로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생각과 활동을 범주화하는 행태는 어쩌면 위대한 인간들에 대한 평범한 이들의 한없는 질투와 집요한 복수일지 모른다. 여하간 정구 형님의 한옥에 대한 탁견에 무릎을 쳤던 것은 사실이다.

“선생님. 음… 저는 한옥을 무조건 예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도 동감해요. 일종의 안티랄까요? 대표적인 게 온돌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온돌을 예찬하잖아요? 방바닥을 뜨겁게 해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는 놀라운 건축 방식이라고. 하지만 바로 그 온돌 때문에 한옥은 층을 올리지 못했어요. 부엌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난방 구조로 인해 층을 만들지 못하니 공간을 집약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그렇게 되니 집약적인 성장 자체가 불가능해지잖아요?”

건축가 류현준 선생의 대답이었다. 선생의 지적은 정확했다. 우리 것에 대한 과도한 믿음, 소위 국뽕 정서가 지나치고 그것이 전통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를 비교하더라도 조선의 전통 건축은 너무나 정태적이었다. 이미 송나라 시절 중국의 번화가에는 4층짜리 건물이 등장했고 에도 막부 시대 2층 이상의 장옥집은 일본에서는 흔한 건축물인 데 반해 조선 말기 한양의 번화가에도 층을 가진 한옥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건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난점을 지닌다. 첫째, 지붕이 너무 크고 화려하며 그만큼 무겁다. 거창한 기와 속에는 1미터가 넘는 흙이 들어가 있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나무 기둥은 난잡할 정도로 복잡한 형식을 띤다. 둘째, 기둥의 소재를 나무로 사용했기 때문에 중층을 이루는 건축물을 만들기 쉽지 않은데 담이나 기단을 만드는데 ‘돌’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서양처럼 건물의 골조로 이용하는데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과 일본은 우선 거창한 기와지붕을 간소화했다. 흙은 빼고, 처마 장식의 없애면서 지지대의 부담을 줄이거나 기와 대신 나무를 소재로 사용함으로 지붕을 가볍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흙 대신 벽돌을 활용하거나 난방 구조를 최소화하여 나무로 층을 높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이런 변화가 한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류현준 선생의 답변은 완전하지 않다. 온돌이 방 전체에 깔리는 형태는 조선 후기는 되어야 했고 오랜 기간 온돌은 난방이 필요한 바닥에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온돌 때문에 층이 있는 건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건축학적이다. 정구 형님의 답변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옥은 마당에 연못이나 화단 같은 장식적 요소를 배격하는데 이는 정체된 전통 건축의 이면이기도 하다. 자연 공간과 생활 공간의 간극을 정확히 나누어 덩굴이나 잡초의 침입을 막기 위한 비교적 단출한 건축 방식이니 말이다.

왜 한국에서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는 이념적이거나 사회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보다 명확해진다. 조선은 농업을 예찬하며 검약을 실천했던 유교 국가였다. 또한 활발한 상업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18세기 후반이 돼도 한양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5일장이 섰을 뿐 상설 시장이 없었다. 같은 시기 중국은 수만 개, 일본은 수천 개의 상설 시장이 있었던 것에 비교하면 지나칠 정도로 초라했다. 즉, 건물이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사회경제적 상황이 존재하지 않았을뿐더러 유교적인 이상이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건축적 혁신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왜 조선에서는 에도 시대에 등장했던 화려한 정원과 복잡한 복도를 가진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한반도의 경우 한때 안압지로 알려졌던 신라의 월지 그리고 최근 발굴된 백제 왕궁의 정원 등 이른 시점에 높은 정원 기술의 발전을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조선은 정교하고 특정한 양식을 통해 공간을 꾸미기보다는 그것이 위치한 곳에서 누릴 수 있는 자연 자체를 중요시 여겼다. 이에 반해 일본은 정원과 공간에 대한 오래된 노력을 통해 놀라운 수준의 전통 공간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여기 <기이한 춤; 기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기이한 형식을 띤다. 화자는 전통 건축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화면은 소격동 165번지의 기무사 건물을 구석구석 비추고 있다. 한때 종친부 건물이 있었고 일제강점기 때는 병원이었으나 해방 후 독재정권의 수호자 역할을 하던 군 정보기관 기무사. 작품은 정형화된 형식을 비껴가기로 작정한 것 같다. 화자는 전통 건축의 의의를 설명할 때 자막은 기무사 터의 누적된 역사를 이야기하다 다시금 남겨진, 오래된 건축물의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모습들을 지속적으로 비추니 말이다. 마치 작품의 모토가 ‘나 잡아 봐라~’라는 식이다. 잡히는 대로 잡아보자. 나의 경우는 전통 건축에 대한 보다 정립된 생각이 만들어졌다면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글쓴이. 심용환

(주)심용환역사앤교육연구소 소장, 성공회대학교 열림교양대학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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