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영화&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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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달] 독립영화 큐레이션 구독 서비스, 다달 3호 (2026.05.01.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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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명소희│2018│다큐멘터리│8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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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명소희│2014│다큐멘터리│36분

<어느 날, 여름에게>

명소희 | 2025 | 다큐멘터리 |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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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엄마됨에 대해

: 명소희 감독, <방문> <24> <어느 날, 여름에게>


글. 권김현영(여성학자)


언젠가부터 우리는 종(種)으로서의 인간을 중심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는 데 익숙해졌다. 인구 감소, 저출생 담론부터 인간중심주의의 극복을 이야기할 때의 인간 역시 하나의 종적 분류로서의 영장류 인간이라는 범주를 떠올리는 식이다. 이런 얘기들의 결론은 대체로 만물의 영장이니 하며 자아를 비대하게 만들어온 인간의 오만함을 꾸짖으며,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원일 뿐임을 환기하면서 서로를 돌보고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전개로 쓰인 글을 읽을 때마다, 서로를 살피고 돌보는 사회로 전환하자는 결론보다는 논의의 전개과정에서 오만하고 독선적인 우세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혐오가 더 뚜렷하게 남는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학살을 보면 인간이란 종 자체에 대한 희망을 종종 잃어버리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말 그것이 인간됨을 정의하는 것으로 삼아도 되는 걸까.


취약성에 기반한 상호의존이 인간 삶의 조건이라는 명제를 가장 정확하게, 에두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있다. 관계 이야기, 더 구체적으로는 엄마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주 일방적으로 삶 전체를 맡길 수밖에 없는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엄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많은 인간이 엄마가 되어 타인에게 자신을 내주는 엄마됨을 실천해왔는데, 인간의 엄마됨 없이는 그 누구도 인간의 인간됨에 도달할 수 없었는데, 그 역사와 경험이 너무 적게 이야기되어왔던 것은 아닐까. 페미니즘은 ‘모성 신화’가 여성에게 성역할을 강요해왔다는 이유로 비판해왔고, 그 비판은 온당하다. 하지만 모성적 행동과 사유는 ‘신화’가 될 만큼 대단한 인간 행동인 것 역시 사실이다. 엄마가 된 인간들은 대부분,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극단적으로 취약한 대상의 생사여탈권을 손안에 쥐고 있으면서도 그 권력이 거의 남용되지 않고 통제해 왔다. 물론 그렇게 작동하지 못했던 폭력과 학대의 역사 역시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떠올리는 다수의 장면은 이 놀라운 ‘자기 억제’ 쪽에 가깝다. 그렇게나 많은 인간이 엄마됨을 경험했고, 그걸로 인해 더 많은 인간이 생존을 영위해나갔다는 걸 떠올려보면 이 행동과 관계에 대한 의미는 아무리 말해도 너무 적게 이야기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 역시 늘 엄마에게 더 의존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다른 누구보다도 엄마의 차별에 민감했으며, 엄마가 한 말은 뭐 하나 흘려듣지를 못했다. 대체 엄마가 된다는 게 무엇이길래 이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왜 나에게 당신을 더 충분히 내어주지 않았냐는 부당한 마음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걸까. 아이들은 부모, 특히 엄마의 절대적 중요성을 점차 상대화하면서 자란다. 하지만 엄마 품을 떠나 잘 살 때는 괜찮다가도, 사는 게 힘들어지고 어디 숨을 데도 없이 세상에 던져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엄마가 인생에서 다시 너무나도 중요해진다.


명소희 감독의 세 영화 <방문>, <24>, <어느 날 여름에게>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자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며, 여름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엄마와 자신의 고향에 살았던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들은 결국 인간의 엄마됨과 관계의 감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다.


<24>에서 스물 넷의 감독은 글이 안 풀려서 괴로워하다가 엄마를 찾아간다. 자신에게는 도저히 글재주 같은 건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글쓰기에 매달려 있는지 생각하다가 엄마가 글을 써보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마 엄마가 글을 칭찬해주지 않았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랬다. 아빠와 펜팔로 만남을 시작한 엄마는 자신의 글쓰기 재능에 자부심이 있었다. 언니와 내가 책을 쓸 때, 오빠가 사보에 글을 실었을 때, 엄마는 그 모든 것이 엄마의 글쓰기 유전자 덕분이라며 으쓱해했다. 자식들은 모두 엄마의 인정을 바랐지만 엄마는 쉽게 인정을 주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나 역시 엄마의 인정을 바라면서도, 정작 엄마의 글을 궁금해한 적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엄마가 된다는 건 대체 뭘까. 엄마됨이라는 것은 이렇게 관계의 일방성을 견뎌내는 힘이 없으면 안 되는 걸까.


<24>에서 감독은 엄마가 글을 쓰라고 했지만,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니었다며 카메라를 들고 엄마가 사는 춘천으로 가서 엄마를 찍기 시작한다. 엄마가 찍지 말라고 하자 딸은 되묻는다. 왜? 이 장면이 너무 ‘진실’이어서 나는 몇 번이고 돌려보면서 웃다가 울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출연자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또 있을까. 없다. 그것은 자식만이 가질 수 있는 강짜이며, 그 강짜 앞에서 결국 “그래, 찍어라”라고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엄마의 엄마됨이다.


<방문>에서 감독은 엄마의 엄마와 엄마의 관계, 그리고 자신과 엄마의 관계, 그리고 곧 엄마가 될 자신을 찍는다. 엄마도 엄마의 엄마의 성차별에 진저리를 쳤고, 그러면서도 징글징글하게 엄마를 사랑했고 미워했고, 그러다 떠남을 슬퍼하며 장례를 치른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터트린 아이 같은 눈물을 카메라로 담은 장면 뒤에 나는 감독의 얼굴이 궁금했다. 사람들은 엄마 앞에서만, 남들 앞에서는 보여주지 않는 모습으로 화내고 울고 짜증을 낸다. <방문>에서 카메라가 영 불편했던 감독의 엄마는 어느 순간 그냥 포기하고 자신을 내어준다. 엄마 앞에서만 나오는 그 어리광은 그 ‘포기’와 ‘내어줌’이 만들어낸 공간일 것이다.


<어느 날 여름에게>는 엄마와 감독이 나고 자란 춘천이라는 도시의 장소성을 다시 찾아가는 영화다. 개발 이후 사라진 여성들의 자리는 남겨진 곳에 손글씨로 쓰여진 이름, 고여 있는 곳에 물이 차오르면 나는 물비린내, 낡은 나무틀에서 점선을 그리며 윙윙거리는 날벌레로 남아 있다. 거리를 만들고자 했으나 결국은 다시 회귀해서, 엄마의 얼굴 앞에서 엄마됨을 준비하고 있는 감독이 영화 안에서 남겨두고자 한 장면들은 나와 타인의 경계를 구획하는 원격 감각의 세계와는 다른 촉각적이고 후각적인 경험이다. 그것은 거리두기로부터가 아니라, 서로 살을 부대끼고 냄새를 묻히며 살아가는 인간의 흔적들이다. <방문>에서 호객꾼으로, 가이드로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생생한 삶을 전달하는 장면이 엄마의 인간됨을 드러낸다면, <어느 날 여름에게>는 사라져버렸지만 부대낌의 흔적이 남은 장면들을 남겨둔다. 나는 이 장면들을 인간의 엄마됨에 대한 이야기로, 서로의 기억이 흔적으로 남겨진 인간 삶의 보편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글쓴이.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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